(공모) 갈수록 더 그리운 어머니에게
- 글번호
- 346262
- 작성자
- 박춘희
- 작성일
- 2021.04.30 23:10
- 조회수
- 904
- 공개여부 :
- 공개
추모의 글
갈수록 더 그리운 어머니에게
-어머니의 흔적-
아들 박춘희(朴椿熙)
어머니, 심성이 고와서인가 어머니가 그토록 좋아하시던 꽃이 만발하였습니다. 이제 5월입니다. 어버이날이 있는 달이어서 누구라도 한 번쯤은 –아니 그 이상이라도- 부모님, 특히 어머니를 생각할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창 시절,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라는 노래를 부를 때면 노래를 부르기보다는 그저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 노래는 바로 우리 어머니를 노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어머니가 하늘나라로 가신지 어언 6년이나 흘렀고, 아들인 제 나이도 고희(古稀)를 넘겼는데도 아직도 때때로 눈물짓고 있습니다.
그리운 어머니, 사도 바울이 자기는 예수의 흔적을 지녔다고 하였는데, 어머니는 제 가슴에 어머니의 흔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육체에도, 그리고 어머니의 믿음 생활에서도 흔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어머니가 그리울 때면 그 흔적을 되뇌곤 합니다. 어머니 기일 때에는 아들딸 손자들에게 그 흔적을 추모사처럼 들려주기도 한답니다.
먼저 어머니의 육체에 남기신 흔적입니다. 어머니는 곱디고운, 숱이 많은 머리카라락을 언제나 조선 시대 여인처럼 쪽지고 비녀를 꽂으셨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짐을 이고 다니셔서 언젠가부터 머리 한가운데는 살갗이 드러났지요. 물론 살기 위해 그리하셨지만, 두 아들, 저와 제 아우가 일 년 차를 두고 이어서 군에 갔을 때, 그 3년 기간에 어머니는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하여 수십 리 길을 이것저것을 이고 다니셨다 하셨습니다. 아아, 그러니까 어머니가 머리에 이고 다니신 짐은 하나는 삶의 무게요, 또 하나는 외로움의 무게였습니다.
또 하나, 어머니의 뺨은 늘 사과처럼 빨갛게 달아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장사하시던 시장은 지붕만 있고 벽이 없었지요. 그러니까 노점상이나 다름없어서 비와 눈은 피할 수 있었으나 바람과 추위는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한겨울 매서운 추위가 불어와도 얼굴을 가려줄 만한 수건도 변변히 없었고, 수건을 쓴다 한들 한기를 막아낼 재간이 없었을 것입니다. 종일 그렇게 계시다가 그나마 온기가 있는 집으로 돌아오시면 얼굴이 화끈거리며 빨갛게 달아올랐습니다. 그것이 반복되자 계절과 상관없이 늘 어머니 뺨은 불그스레한 빛을 띠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분명히 참 고우신 미인이셨는데, 사과 뺨까지 가지시게 되셨지요.
그리고 세 번째 흔적은 발바닥입니다. 어머니의 발바닥은 소나무 껍질처럼 딱딱하고, 두껍고, 꺼칠꺼칠하였습니다. 동상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그러한 발을 볼 때면, 약간 투명하게 보이는 얼어있는 무 같았습니다. 어머니는 추운 겨울날 집에 돌아오시면, 발을 따뜻한 물에 넣어 보기도 하고, 때로는 얼음물에 집어넣곤 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발을 수술하지 않아도 괜찮았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그러한데도 어머니는 자신의 고생에 대해서는 별로 내색하지도 않으시고, 오히려 남의 걱정을 하셨지요. 어머니 입에 늘 붙어 있는 말씀은 아무개가 “얼마나 힘들겠나? 얼마나 춥겠나? 얼마나 배고프겠나? 얼마나 고생하겠나?” 이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면서 어머니는 남의 일로 눈물지으셨어요. 돌아가시기까지 그러하셨어요.
어머니, 어머니는 신앙 흔적도 남겨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일생 새벽기도를 하셨습니다. 어김이 없었습니다. 어머니, 우리 고향교회가 창립 67주년 감사예배에 참석하였을 때, 창립자 중에 한 분이시라고 표창도 받으셨지요. 그 예배에서 옛적 담임목사님이셨던 한 분이 축사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어느 몹시 춥고 눈이 많이 온 겨울날, 새벽기도회에 교인이 딱 두 명만 나왔는데, 그중에 한 분이 어머니셨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어머니는 백 세가 넘으셨어도 몸이 허락할 때까지 4층 교회 계단을 오르내리시면서 새벽기도를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모태에서부터 언제나 모든 집회에 두 아들을 꼭 교회로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예배당 마루, 어머니 곁에서 잠들었다 오곤 하였습니다. 아직 어릴 때인데도, 한 이 삼십 리를 걸어서 부흥회에 데리고 다녀오셨습니다. 지금, 어쩌다 그 길을 차로 지나다 보면, 어떻게 어린 것이 양말도 없이 고무신만 신고, 자갈길을 걸어서 그 멀리 다녀 왔을까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이랍니다. 하기야 어머니는 백 리 길 넘는 곳을 걸어서 사경회에 참석하셨으니, 몇십 리 저를 데리고 가는 거야 별거 아니었겠지요.
일생 믿음으로 사신 어머니, 어머니는 집에 계실 때에는 찬송을 부르시고, 기도하시고, 성경 보시는 것이 일과이셨습니다. 좋아하시던 찬송가가 제 귀에 아직도 쟁쟁합니다. 식사기도 때에는 식사 전뿐 아니라 식후에도 기도하셨지요. 한번 성경을 펼치시면 몇 시간이라도 읽으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거실 소파는 어머니의 성소(聖所)이었답니다.
어머니, 어머니의 흔적은 이제 나에게 그리움과 눈물로 남습니다. 그립고 그리운 어머니, 훗날 그 천국에서 해후(邂逅)하겠지요. 그때까지 꽃보다 더 아름다운 천국에서 평안히 계셔요.
갈수록 더 그리운 어머니에게
-어머니의 흔적-
아들 박춘희(朴椿熙)
어머니, 심성이 고와서인가 어머니가 그토록 좋아하시던 꽃이 만발하였습니다. 이제 5월입니다. 어버이날이 있는 달이어서 누구라도 한 번쯤은 –아니 그 이상이라도- 부모님, 특히 어머니를 생각할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창 시절,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라는 노래를 부를 때면 노래를 부르기보다는 그저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 노래는 바로 우리 어머니를 노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어머니가 하늘나라로 가신지 어언 6년이나 흘렀고, 아들인 제 나이도 고희(古稀)를 넘겼는데도 아직도 때때로 눈물짓고 있습니다.
그리운 어머니, 사도 바울이 자기는 예수의 흔적을 지녔다고 하였는데, 어머니는 제 가슴에 어머니의 흔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육체에도, 그리고 어머니의 믿음 생활에서도 흔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어머니가 그리울 때면 그 흔적을 되뇌곤 합니다. 어머니 기일 때에는 아들딸 손자들에게 그 흔적을 추모사처럼 들려주기도 한답니다.
먼저 어머니의 육체에 남기신 흔적입니다. 어머니는 곱디고운, 숱이 많은 머리카라락을 언제나 조선 시대 여인처럼 쪽지고 비녀를 꽂으셨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짐을 이고 다니셔서 언젠가부터 머리 한가운데는 살갗이 드러났지요. 물론 살기 위해 그리하셨지만, 두 아들, 저와 제 아우가 일 년 차를 두고 이어서 군에 갔을 때, 그 3년 기간에 어머니는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하여 수십 리 길을 이것저것을 이고 다니셨다 하셨습니다. 아아, 그러니까 어머니가 머리에 이고 다니신 짐은 하나는 삶의 무게요, 또 하나는 외로움의 무게였습니다.
또 하나, 어머니의 뺨은 늘 사과처럼 빨갛게 달아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장사하시던 시장은 지붕만 있고 벽이 없었지요. 그러니까 노점상이나 다름없어서 비와 눈은 피할 수 있었으나 바람과 추위는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한겨울 매서운 추위가 불어와도 얼굴을 가려줄 만한 수건도 변변히 없었고, 수건을 쓴다 한들 한기를 막아낼 재간이 없었을 것입니다. 종일 그렇게 계시다가 그나마 온기가 있는 집으로 돌아오시면 얼굴이 화끈거리며 빨갛게 달아올랐습니다. 그것이 반복되자 계절과 상관없이 늘 어머니 뺨은 불그스레한 빛을 띠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분명히 참 고우신 미인이셨는데, 사과 뺨까지 가지시게 되셨지요.
그리고 세 번째 흔적은 발바닥입니다. 어머니의 발바닥은 소나무 껍질처럼 딱딱하고, 두껍고, 꺼칠꺼칠하였습니다. 동상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그러한 발을 볼 때면, 약간 투명하게 보이는 얼어있는 무 같았습니다. 어머니는 추운 겨울날 집에 돌아오시면, 발을 따뜻한 물에 넣어 보기도 하고, 때로는 얼음물에 집어넣곤 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발을 수술하지 않아도 괜찮았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그러한데도 어머니는 자신의 고생에 대해서는 별로 내색하지도 않으시고, 오히려 남의 걱정을 하셨지요. 어머니 입에 늘 붙어 있는 말씀은 아무개가 “얼마나 힘들겠나? 얼마나 춥겠나? 얼마나 배고프겠나? 얼마나 고생하겠나?” 이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면서 어머니는 남의 일로 눈물지으셨어요. 돌아가시기까지 그러하셨어요.
어머니, 어머니는 신앙 흔적도 남겨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일생 새벽기도를 하셨습니다. 어김이 없었습니다. 어머니, 우리 고향교회가 창립 67주년 감사예배에 참석하였을 때, 창립자 중에 한 분이시라고 표창도 받으셨지요. 그 예배에서 옛적 담임목사님이셨던 한 분이 축사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어느 몹시 춥고 눈이 많이 온 겨울날, 새벽기도회에 교인이 딱 두 명만 나왔는데, 그중에 한 분이 어머니셨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어머니는 백 세가 넘으셨어도 몸이 허락할 때까지 4층 교회 계단을 오르내리시면서 새벽기도를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모태에서부터 언제나 모든 집회에 두 아들을 꼭 교회로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예배당 마루, 어머니 곁에서 잠들었다 오곤 하였습니다. 아직 어릴 때인데도, 한 이 삼십 리를 걸어서 부흥회에 데리고 다녀오셨습니다. 지금, 어쩌다 그 길을 차로 지나다 보면, 어떻게 어린 것이 양말도 없이 고무신만 신고, 자갈길을 걸어서 그 멀리 다녀 왔을까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이랍니다. 하기야 어머니는 백 리 길 넘는 곳을 걸어서 사경회에 참석하셨으니, 몇십 리 저를 데리고 가는 거야 별거 아니었겠지요.
일생 믿음으로 사신 어머니, 어머니는 집에 계실 때에는 찬송을 부르시고, 기도하시고, 성경 보시는 것이 일과이셨습니다. 좋아하시던 찬송가가 제 귀에 아직도 쟁쟁합니다. 식사기도 때에는 식사 전뿐 아니라 식후에도 기도하셨지요. 한번 성경을 펼치시면 몇 시간이라도 읽으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거실 소파는 어머니의 성소(聖所)이었답니다.
어머니, 어머니의 흔적은 이제 나에게 그리움과 눈물로 남습니다. 그립고 그리운 어머니, 훗날 그 천국에서 해후(邂逅)하겠지요. 그때까지 꽃보다 더 아름다운 천국에서 평안히 계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