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ymca, 장흥읍교회, 완도제일교회, 완도안디옥교회
- 글번호
- 345845
- 작성자
- 최충협
- 작성일
- 2020.09.24 17:58
- 조회수
- 1843
- 공개여부 :
- 공개
해남YMCA는 최우열총무가 연맹의 정책을 지역에서 받아들여 농촌고리채 해결과 자조자립을 목표로 양곡조합, 신용협동조합결성을 추진하며 당시 강원용목사가 운영하던 크리스챤 아카데미 농촌사회지도자교육에 농민들을 1976년 9월부터 참여시키고 장기교육(2주간)까지 보내었다.
지역에서는 그전에 크리스챤 아카데미의 농촌지도자 교육간사인 이우재를 비롯 최근무, 강태봉, 최석진, 송보경 등을 강사로 지역교실을 운영하여 농민의 의식화를 추진하였으며 1975년경에는 해남YMCA 농촌개발연구회를 조직하고 기장교회를 중심으로 신협을 창설하고 1978년에는 해남최초의 양곡조합을 연맹의 지원과 개발회원들의 출자로 삼산면 감당리에 설립하였다.
YMCA 농촌사업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사례로 해남Y를 들 수 있다. 해남Y는 최우열 총무의 주도 아래 1972년 9월에 YMCA 신협을 조직하여 창립총회를 실시하였다. 1975년부터는 본격적인 농촌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하여 신협 외에도 양곡조합,시범부락개발 사업 등을 벌이기 시작했다.
해남Y는 신협과 양곡조합 조직 사업 뿐만 아니라 농촌 청소년들을 농촌의 지도자로 육성하기 위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YMCA 농촌사업이 시작되기 전부터 해남지역에는 기존의 크리스찬 아카데미 농민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정광훈,홍영표 씨 등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최우열총무는 이들과 접촉하여 해남YMCA의 농촌사업을 벌여 나갔다. 그리고 농촌사업만을 위해서 ‘해남YMCA 농촌개발연구회’라는 것을 설치하였다. 신협과는 별도로 만들어진 농촌개발연구회가 농민들을 조직적으로 결속시키는 작업을 전개하였다. 농촌개발연구회는 지역 안에 면 단위 대표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수적으로 제한을 두고 있었다.
1976년에 신협조직이 재개되었을 때 해남Y는 몇 차례 조합원 교육을 위한 강습회를 갖고 신협을 창립하였다. 1976년 한 해 동안 6개, 1977년에 4개가 설립되어 이전에 있던 것과 합하면 1977년말 12개의 신협이 조직되었다. 삼산면 감당리(대표 홍영표)를 시범부락으로 선정하여 신용협동조합과 양곡조합을 조직하면서 협동경작을 실시하고자 하였으나 부분협업적인 경작을 하는데 까지 나아갔다. 그리고 1977년 2월에 해남Y는 신협교육을 중심으로 한 해남지역 교육을 실시하였다.
신협이 협동운동의 기초조직으로서 갖는 의의를 충분히 실현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이것이 농민들의 결속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기반이 되었다.
1977년 하반기에 들어오면 해남YMCA에서는 이제까지의 신협조직을 근간으로 하여 농민대학을 개최한다. 해남YMCA 농촌개발연구회(당시 회장, 홍영표)가 농민대학의 내용을 준비하였다. 제1회 농민대학은 1977년 7월 28일에 해남YMCA 강당에서 열렸는네, 신협교육 중심의 지역교육과는 달리 한국농촌의 문제에 대한 보다 분명한 인식을 갖도록 하기 위한 내용을 주 프로그램으로 담고 있었다. 최초의 농민들의 조직으로 볼 수 있는 농촌개발연구회는 월례회로 모였으며 1977년 8월에는 모임의 주제로 “농민운동과 전략”을 다룰 정도로 농민운동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갖고 출발한 것으로 생각된다.
1978년 2월에는 제2회 농민대학이 열리는데 이때는 1회 농민대학과 비교하여 훨씬 더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교육을 실시하려 했다. 우선 교육의 일정이 2월 27일부터 3월 2일까지로 3박 4일로 늘어났고 강의시간도 훨씬 늘어났으며, 사례연구와 함께 과제연구를 제시하여 농민운동의 과제를 참가농민들이 스스로 설정할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제3회 농민대학 프로그램은 농촌사정에 따라 단기현장교육으로 대치되었다. 1978년 5월 14일부터 15일까지 계곡 신평교회에서 열린 부락현장교육은 신용협동조합의 요청에 따라 교육을 가졌으며, 그 내용은 해남YMCA와 농촌운동, ‘농촌문제와 그 해결방안’, ‘협동조합론’이라는 제목의 강의와 ‘농협문제의 해결’, ‘농업세계문제 해결’ 등의 사례발표, 과제 연구로는 ‘부락단위 농촌운동의 과제와 방법’이 다루어졌다. 참가자가 스스로 문제를 발굴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으로 토의가 이루어졌다.
제4회 농민대학은 1978년 9월 19일부터 22일까지 해남읍교회 교육관에서 열렸다. 협동조직체의 건설과 농민지도력의 육성이라는 YMCA 농촌사업의 의도에 어울리는 교육내용이었다.53) 강의와 사례연구, 토의 등과 함께 명상, 노래공부, 운동, 친교의 시간 등을 가졌다. 특히 제4회 농민대학 직전에는 농민축제가 펼쳐졌는데 농악과 군무, 판소리 공연이 있었으며 5백여 명의 지역주민들이 당시의 강사진은 이우재, 장두석, 황석영, 최우열 총무였으며, 주제 강의의 제목은 “농촌지도자의 자각과 그 역할”, “한국농촌 당면문제”, “협동조합론” 등으로 되어 있었다. 농촌선교와 농민운동, 농촌지도자론, 협동조합과 지역사회 개발, ‘계획, 실천, 평가’, 농촌문제의 본질, 농촌문제의 과제, 농업협동조합론, YMCA 농촌운동과 부락개발 등의 주제로 강의가 있었다.
전반적으로 볼 때 해남Y의 신협조직은 농민운동의 기초조직 육성으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농민들의 교육의 장으로서 잘 활용되었다.
그러나 1978년 9월은 해남Y로서는 한 차례 진통의 시기가 있었다. 이때 기독교농민회가 창립(1978. 9. 26)되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농촌개발연구회의 중심회원 일부가 기독교농민회로 가게 되었다. 이 당시 해남지역에서 기독교농민회를 창립하려고 준비하고 있던 사람들은 YMCA는 운동조직으로서는 한계가 있으며 기껏해야 농촌사업일 뿐이지 농민운동은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을 폈고, 이에 맞서서 YMCA 고수론을 펴던 사람들은 그러한 지적이 일부 타당성은 있으나 해남지역의 경우에는 YMCA가 농촌사업의 차원을 넘어서 농민운동으로서의 자기역할을 담당해 왔으며, 당시 있는 농민조직도 농촌개발연구회의 40-50명이 전부인데 기독교농민회를 창립하겠다는 것이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것이라면 별 문제가 없지만 결국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기존의 조직을 떼어내겠다는 것인데 이는 농민운동의 역량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결국 기독교농민회는 옥천면을 기반으로 하여 조직되었으며 정광훈, 윤기현, 정광식 씨 등이 중심적인 지도력을 맡았다.
이로 말미암아 해남Y 농촌개발연구회에서 기독교적 자기지향을 강하게 갖고 있던 인사들은 대부분 기독교농민회로 빠져 나갔고, 비교적 상대적으로 기독교적 의식이 별로 강하지 않은 인사들이 남게 되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해남Y 농촌개발연구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해남YMCA 농민회’를 창립하게 된다.
해남Y 농민회는 1979년 2월 8일 창립되었다. 해남Y 농민회가 결성되는 배경에는 기독교농민회의 창립도 한 이유가 되었지만 기본적으로는 YMCA가 전개하는 농촌사업의 사업으로서의 성격을 탈피하자는 것이 근본취지였다. 농민회는 이전에 존재했던 농촌개발연구회가 협의체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회원조직으로 확대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따라서 운영위원회를 두고 운영위원은 면단위로 선출하도록 하였다.
1979년까지 해남지역에는 농촌사업의 결과로 신협 167개, 양곡조합 1개, 시범부락 1개, 각종 교육 8회의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중 양곡조합과 시범부락은 모두 감당리에서 이루어졌다. 1979년 4월에는 함평 고구마 보상운동에 따른 갖가지 행사에 20여명의 Y농민회 회원들이 참석하였고, 북일면 내동리에서 특정인에게 잃은 마을앞 갯펄을 회원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찾아냈는가 하면 특정 상인과 농산물 검사원과 짜고 일반 농민이 생산한 보리수매를 거부하고 상인들 것만 봐주는 사례가 삼산면에서 발생하여 회원들의 즉각적인 대처로 해결하였다.
지역에서는 그전에 크리스챤 아카데미의 농촌지도자 교육간사인 이우재를 비롯 최근무, 강태봉, 최석진, 송보경 등을 강사로 지역교실을 운영하여 농민의 의식화를 추진하였으며 1975년경에는 해남YMCA 농촌개발연구회를 조직하고 기장교회를 중심으로 신협을 창설하고 1978년에는 해남최초의 양곡조합을 연맹의 지원과 개발회원들의 출자로 삼산면 감당리에 설립하였다.
YMCA 농촌사업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사례로 해남Y를 들 수 있다. 해남Y는 최우열 총무의 주도 아래 1972년 9월에 YMCA 신협을 조직하여 창립총회를 실시하였다. 1975년부터는 본격적인 농촌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하여 신협 외에도 양곡조합,시범부락개발 사업 등을 벌이기 시작했다.
해남Y는 신협과 양곡조합 조직 사업 뿐만 아니라 농촌 청소년들을 농촌의 지도자로 육성하기 위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YMCA 농촌사업이 시작되기 전부터 해남지역에는 기존의 크리스찬 아카데미 농민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정광훈,홍영표 씨 등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최우열총무는 이들과 접촉하여 해남YMCA의 농촌사업을 벌여 나갔다. 그리고 농촌사업만을 위해서 ‘해남YMCA 농촌개발연구회’라는 것을 설치하였다. 신협과는 별도로 만들어진 농촌개발연구회가 농민들을 조직적으로 결속시키는 작업을 전개하였다. 농촌개발연구회는 지역 안에 면 단위 대표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수적으로 제한을 두고 있었다.
1976년에 신협조직이 재개되었을 때 해남Y는 몇 차례 조합원 교육을 위한 강습회를 갖고 신협을 창립하였다. 1976년 한 해 동안 6개, 1977년에 4개가 설립되어 이전에 있던 것과 합하면 1977년말 12개의 신협이 조직되었다. 삼산면 감당리(대표 홍영표)를 시범부락으로 선정하여 신용협동조합과 양곡조합을 조직하면서 협동경작을 실시하고자 하였으나 부분협업적인 경작을 하는데 까지 나아갔다. 그리고 1977년 2월에 해남Y는 신협교육을 중심으로 한 해남지역 교육을 실시하였다.
신협이 협동운동의 기초조직으로서 갖는 의의를 충분히 실현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이것이 농민들의 결속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기반이 되었다.
1977년 하반기에 들어오면 해남YMCA에서는 이제까지의 신협조직을 근간으로 하여 농민대학을 개최한다. 해남YMCA 농촌개발연구회(당시 회장, 홍영표)가 농민대학의 내용을 준비하였다. 제1회 농민대학은 1977년 7월 28일에 해남YMCA 강당에서 열렸는네, 신협교육 중심의 지역교육과는 달리 한국농촌의 문제에 대한 보다 분명한 인식을 갖도록 하기 위한 내용을 주 프로그램으로 담고 있었다. 최초의 농민들의 조직으로 볼 수 있는 농촌개발연구회는 월례회로 모였으며 1977년 8월에는 모임의 주제로 “농민운동과 전략”을 다룰 정도로 농민운동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갖고 출발한 것으로 생각된다.
1978년 2월에는 제2회 농민대학이 열리는데 이때는 1회 농민대학과 비교하여 훨씬 더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교육을 실시하려 했다. 우선 교육의 일정이 2월 27일부터 3월 2일까지로 3박 4일로 늘어났고 강의시간도 훨씬 늘어났으며, 사례연구와 함께 과제연구를 제시하여 농민운동의 과제를 참가농민들이 스스로 설정할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제3회 농민대학 프로그램은 농촌사정에 따라 단기현장교육으로 대치되었다. 1978년 5월 14일부터 15일까지 계곡 신평교회에서 열린 부락현장교육은 신용협동조합의 요청에 따라 교육을 가졌으며, 그 내용은 해남YMCA와 농촌운동, ‘농촌문제와 그 해결방안’, ‘협동조합론’이라는 제목의 강의와 ‘농협문제의 해결’, ‘농업세계문제 해결’ 등의 사례발표, 과제 연구로는 ‘부락단위 농촌운동의 과제와 방법’이 다루어졌다. 참가자가 스스로 문제를 발굴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으로 토의가 이루어졌다.
제4회 농민대학은 1978년 9월 19일부터 22일까지 해남읍교회 교육관에서 열렸다. 협동조직체의 건설과 농민지도력의 육성이라는 YMCA 농촌사업의 의도에 어울리는 교육내용이었다.53) 강의와 사례연구, 토의 등과 함께 명상, 노래공부, 운동, 친교의 시간 등을 가졌다. 특히 제4회 농민대학 직전에는 농민축제가 펼쳐졌는데 농악과 군무, 판소리 공연이 있었으며 5백여 명의 지역주민들이 당시의 강사진은 이우재, 장두석, 황석영, 최우열 총무였으며, 주제 강의의 제목은 “농촌지도자의 자각과 그 역할”, “한국농촌 당면문제”, “협동조합론” 등으로 되어 있었다. 농촌선교와 농민운동, 농촌지도자론, 협동조합과 지역사회 개발, ‘계획, 실천, 평가’, 농촌문제의 본질, 농촌문제의 과제, 농업협동조합론, YMCA 농촌운동과 부락개발 등의 주제로 강의가 있었다.
전반적으로 볼 때 해남Y의 신협조직은 농민운동의 기초조직 육성으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농민들의 교육의 장으로서 잘 활용되었다.
그러나 1978년 9월은 해남Y로서는 한 차례 진통의 시기가 있었다. 이때 기독교농민회가 창립(1978. 9. 26)되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농촌개발연구회의 중심회원 일부가 기독교농민회로 가게 되었다. 이 당시 해남지역에서 기독교농민회를 창립하려고 준비하고 있던 사람들은 YMCA는 운동조직으로서는 한계가 있으며 기껏해야 농촌사업일 뿐이지 농민운동은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을 폈고, 이에 맞서서 YMCA 고수론을 펴던 사람들은 그러한 지적이 일부 타당성은 있으나 해남지역의 경우에는 YMCA가 농촌사업의 차원을 넘어서 농민운동으로서의 자기역할을 담당해 왔으며, 당시 있는 농민조직도 농촌개발연구회의 40-50명이 전부인데 기독교농민회를 창립하겠다는 것이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것이라면 별 문제가 없지만 결국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기존의 조직을 떼어내겠다는 것인데 이는 농민운동의 역량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결국 기독교농민회는 옥천면을 기반으로 하여 조직되었으며 정광훈, 윤기현, 정광식 씨 등이 중심적인 지도력을 맡았다.
이로 말미암아 해남Y 농촌개발연구회에서 기독교적 자기지향을 강하게 갖고 있던 인사들은 대부분 기독교농민회로 빠져 나갔고, 비교적 상대적으로 기독교적 의식이 별로 강하지 않은 인사들이 남게 되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해남Y 농촌개발연구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해남YMCA 농민회’를 창립하게 된다.
해남Y 농민회는 1979년 2월 8일 창립되었다. 해남Y 농민회가 결성되는 배경에는 기독교농민회의 창립도 한 이유가 되었지만 기본적으로는 YMCA가 전개하는 농촌사업의 사업으로서의 성격을 탈피하자는 것이 근본취지였다. 농민회는 이전에 존재했던 농촌개발연구회가 협의체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회원조직으로 확대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따라서 운영위원회를 두고 운영위원은 면단위로 선출하도록 하였다.
1979년까지 해남지역에는 농촌사업의 결과로 신협 167개, 양곡조합 1개, 시범부락 1개, 각종 교육 8회의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중 양곡조합과 시범부락은 모두 감당리에서 이루어졌다. 1979년 4월에는 함평 고구마 보상운동에 따른 갖가지 행사에 20여명의 Y농민회 회원들이 참석하였고, 북일면 내동리에서 특정인에게 잃은 마을앞 갯펄을 회원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찾아냈는가 하면 특정 상인과 농산물 검사원과 짜고 일반 농민이 생산한 보리수매를 거부하고 상인들 것만 봐주는 사례가 삼산면에서 발생하여 회원들의 즉각적인 대처로 해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