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모] 엄마, 사랑해! 이뻐! 나 사랑해?

글번호
346974
작성자
김태우
작성일
2022.04.25 13:38
조회수
395
이제사 생각해보니 잘 걷지 못하고 걸을 때마다 숨을 헐떡이는 내 엄마를 보면서 나는 참 무심하고 무던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잘 걷지 못하면 신진대사가 힘들어지고 모든 만병의 근원이 되는 것이거늘. 오늘도 미련한 딸년은 이 애처러운 나의 엄마가 너무도 보고 싶다.

엄마와 나 사이. 엄마가 몸저 눕기 전까지는 갈등이 불거져 있는 일종의 애증의 관계였다. 나는 엄마가 신체적으로 낳은 아이가 아닌 얼떨결에 가슴으로 낳고 키우면서 끊임없이 아파했던 유전적인 관계의 엄마와 딸사이는 아니였다.

가슴으로 낳았던 그 상처와 아픔으로 인해 침해의 안개가 엄마를 가끔씩 엄습해 오면 엄마는 나를 타인처럼 밀어버리고 공격해왔다.
" 내가 왜 네 엄마니? 니가 왜 내 딸이니?
실컷 나를 향해 독성을 뿜어댄 엄마는
그러면서도 미운정과 애증으로 범벅이 되버린 자신을 수습하기 힘들어하곤 했다.

" 엄마, 사랑해! "

엄마가 대소변을 직접 볼 수 있는 기력마저 떨어지자
" 태우야, 나는 아무도 없잖아."
내가 자신을 버려두고 도망이라도 갈까봐그런지 엄마는 전전긍긍했다.
화장실이 푸세식이고 집에서 20m 떨어진 곳에 화장실이 있었기에 엄마의 대소변 오물을 처리 하려면 모아서 한꺼번에 버려야 했다. 희안한 것은 엄마의 대소변 처리가 전혀 더럽거나 힘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의 모든 관심과 집중은 엄마를 어찌하면 다시 일어나게 해서 대소변을 혼자 힘으로 보러 다니게 하고 다시 걷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러는사이에 내가 중요한 것을 놓쳐버렸다는 것이다. 그것은 엄마가 나에게 있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존재이며 사랑스러운 존재인가를 고백하므로 엄마에게 살아야 겠다는 동기를 부여해 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응급차에 실려 병원에 입원해서도 내가 종일 옆에 있어주기를 엄마는 바랬다. 십여년 넘게 같이 살아 온 샤모에드 견종인 베콤의 먹거리를 챙겨주고 병원에 오면 자신보다 개한테 더 신경을 쓰는가 하여 섭섭한 눈치였다. 부족한 돈에 간병 아주머니를 구하자 그제서야 엄마는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는 것 같아서 기뻤다.


" 엄마, 이뻐! "

우리집 반려견 '베콤'에게 습관적으로 하는 "베콤, 이뻐! "라는 나의 평상시의 말에다 토를 달 듯 엄마가 나에게 물었다. "엄마, 이뻐? " 엉뚱한 질문 같았다. ''빨리 낫는게 문제지, 그게 뭐 대수?' 그 때는 이렇게 생각하고 스스로 반문하였는지도 모른다. 허나 틀렸다. " 엄마, 이뻐!"라는 말을 듣기를 엄마는 원했던 것이다. "내 엄마, 이뻐! 사랑해 엄마!"

엄마의 대소변 수발 중에도 엄마의 독설은 여전했다.
" 내가 왜 네 엄마니? 키워줬으면 감사한 줄 알아야지? "
예전처럼 속이 확 뒤집어지고, 분노가 밀려왔지만
" 지금은 엄마가 아프니까 예수님의 사랑으로 내가 참는다."
하고 대충 마무리했다.허나 속이 상하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병원에서 호전된 듯 보여 다시 퇴원을 하게 되었다. 허나 다시 심부전증이 악화가 되었는지 엄마의 온몸은 퉁퉁 부어올랐다.
이동목욕에 대해 이야기하자 좋아할 줄 알았던 엄마는 죽을 때가 되었나보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나는 애간장이 녹아 내렸다. 그 때의 엄마의 눈물이 아직도 눈과 마음에 선하다.

" 병원~!"
엄마는 못견디겟다는 듯이 병원을 외쳤고, 응급차로 다시 병원에 실려갔다.나는 임시 코로나 보호자 대기 천막에서 하나님을 향해 살려달라.살려달라 하나님께 애원했다.우리 세식구 건강하게 살려만 주시면 엄마를 위해 식이요법 철저히 하고 진짜 열심히 치료하면서 기도드리겠습니다라며 간구하고 절규했다. 그 날 따라 강한 바람이 야외의 임시천막을 내리치고 있었다. 나는 하나님이 응답해주셨다에 나의 적은 믿음을 걸었다. 허나
의사들은 엄마의 상태가 심각하다고 했고, 엄마는
" 평소에 절대 인공호흡기는 꽂지마라." 했지만
혹여 살아나지않을까? 라는 기대로 나는 인공호흡기까지 받아들이게 되었다.
코로나로 면회가 힘든 틈 사이사이
나는 엄마에게
" 엄마, 사랑해! "
" 엄마, 이뻐!, 엄마 감사해요!"라고 외쳤다.
그리고
" 엄마, 나 사랑해 ? "라 물었더니
엄마는 그렇다고 고개로 표시했다.
비록 육신은 무너지고 있었으나 엄마의 정신은 말짱한 듯 보였다.
나는 끝까지 적은 믿음을 포기하지 못했다.
마침내, 응급실에서 인공호흡기를 꽂아서 엄마를 가지고 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 엄마, 미안해. 못 볼꼴 보여줘서 정말 미안해."

코로나로 면회도 제대로 못하게하고
찬송가도 성경도 마음 껏 불러주고 읽어주지 못한 상태로 엄마와 이별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에 엄마를 다시 집으로 데리고 가고 싶을 정도로 마음은 슬프고 절박했다.

결국,
" 엄마, 나혼자 놔두고 가지마!!"
나는 절규를 토해냈다.
나의 이 말에 엄마는 가장 슬프게 반응했다.
그것은 세상에 저걸 혼자 두고 가려는 서러운 어미의 마음이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아니 그것은 사랑을 넘어서 이 척박한 세상에서 마음을 두고 서로 의지하고 있었던 하나의 질긴 인연의 줄이였다. 하나님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하나된 우리 삼모녀 가족들. 세상의 환란과 시험 속에서 기근과 병과 죽음과 싸우다 지칠대로 지쳐버려 서로 반목하고 원망했지만, 그래도 서로를 의지하고 마음을 두었던 내 가족이였고 울타리 였던 것이다.

내 엄마는
2021년 1월 29일. 예수의 손을 잡았다.
김성희는 의학적으로 사망했고, 김성희 권사는 하늘나라로 소천되었다. 하지만
그 때 나의 신앙 자체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하나님이란 존재에 대해. 그리고 나의 기도 응답에 대해.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엄마가 마지막 병원으로 가기 며칠 전에
" 집에 가득찼네? 푸르고 누르스름한 청황색 말이 있네, 말이 모두 네마리가 있어. 흰말도 있고..."
" 그런거 쫒아내고 기도로 물리쳐. "
" 태우 네가 기도로 물리쳐라." 하던 그 말.
엄마를 살려달라는 애절한 나의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셨고 엄마는 속절없이 떠나버렸다. '나는 하나님이 내 기도만 절대 응답 안해주기로 작정되어 있는 사람이구나, 내 간절한 소원은 이뤄주시는 게 하나도 없구나.'하는 생각으로 믿음이 마구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에, 무심코 청황색 말을 인터넷 검색창에서 검색하다가 요한계시록에 말이 네마리가 있고, 청황마는 죽음을 상징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씀에 깜짝놀라 나는 지금도 가만히 나의 적은 믿음을 추스려 가면서 주님이 주신 믿음 안에서 이 일들을 생각하고 있다.
결국, 나는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것 조차도 실패하고 말았다.

[ 요한계시록 6:8 ]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

납골당비가 비싸고 유지비도 많이 드니까 화장해서 뿌리자는 이모댁 친지들의 의견을 뒤로한 체 내가 내겠노라. 돈을 벌어서 앞으로의 유지비도 내겠노라며 기도원 크리스천 메모리얼 파크에다 김성희 권사 몫의 유골 봉안을 요청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교구목사님이 기초수급자의 혜택을 알아보시고 메모리얼 파크 B구역 10단 06열 개인단에 유골 봉안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다.나는 10년 계약금을 내고 정말 감사하게 그 곳에다 김성희 권사,우리 삼모녀, 우리 식구들의 삶을 기념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얻을 수 있었다.
" 엄마, 사랑해! "
" 엄마, 이뻐!,엄마 감사해요!"
" 엄마, 나를 사랑한 거 알아, 엄마도 나 알지? 엄마 하늘나라에서 응원하고 기도하고 도와줘. 우리 삼모녀 가족,화이팅! "

이번 부활절부터는
하나님께서 나를 기도원 성가대로 인도해 주셨고 나는 매주마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다. 아울러 매주마다 언제든지 크리스천 메모리얼 파크를 찾아갈 수 있는 기회도 생긴 것이다.

" 나 주의 믿음 갖고 홀로 걸어도
나 주의 믿음 갖고 노래 부르네~

할렐루야~! "